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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들

나의 이사 이야기 (4) - 어린 시절(from 성당동 to 칠곡 태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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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은 아침에 나가면 오후에 들어온다. 

 

자전거와 축구공을 가지고 어디를 다니는지, 하루 종일 쏘다닌다.

 

이렇게 동네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동네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는데, 이사를 간다면 이 아이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내 어린 시절 이사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려 한다.

 

반백살에 다가가고 있어서 기억이 드문드문 나고 그 시절의 교우관계는 이제 다 소원해졌지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한번 써보자. 

 


최초의 기억은 지금은 '초등학교'로 변해버린 '국민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당시 나의 이사는 부모님의 재테크 목적이 아닌, 공장의 이동에 의한 것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작은 섬유공장을 하셨다.

 

이때 부모님은 '직원'에서 '사장'으로 변신을 시도하셨던 것 같다.

 

섬유공장에서 일을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섬유공장을 차리셨다. 

 

거창하지는 않다.

 

그냥 섬유기계 - 옷감을 만드는 - 를 6대 정도 사서, 이 사람들이 큰 공장에 모여 일을 하신다.

 

지금 중고차매매단지에 가면 이런 시스템일 것이다.

 

땅을 임대하여 자기 구역에서 자기가 알아서 장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성당동에서 살고 있던 나는 부모님을 따라 칠곡... 지금의 태전교 로 이사를 갔다.

 

지금의 태전교, 내가 살던 곳은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성당동에서 나는 성남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1학년 10반이었고, 담임 선생님 성함은 권기정 선생님이셨다.

 

지금 글을 쓰는 시간은 새벽 4시이고 나는 미친 듯한 새벽형 인간인데,

 

지금 글을 쓰면서 회상을 해보니 1학년때도 그랬던 것 같다.

 

아침에 제일 일찍 갔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나에게 열쇠를 맡기시며, 교실 문을 열라고 하셨다.

 

나는 큰 사명을 받은 듯, 열심히 했다. 

 

<추억1>

 

성남초 근처에는 파도고개라는 것이 있다. 

 

파도처럼 구불구불한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 에 학교가 있었다. 

 

지금 내가 살던 동네는 재개발되어서 '대명자이'가 들어설 예정이다.

 

당시에는 누구나 오래 걸어 다니고, 버스타고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나 역시 그러했다.

 

횡단보도에 신호등도 많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 비가 왔던 것 같다.

 

우비를 뒤집어 쓰고, 등교하는 1학년 아이의 시야는 마치 사이드로 눈을 가린 경주마의 그것과 같았다.

 

앞만 보던 내 눈에 차가 사라지자,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는데, 달려오던 1톤트럭과 부딪혀서 날아갔다.

 

가벼운 1학년 아이고, 마침 그 차도 천천히 갔는지 데굴데굴 구르고 그냥 잘 일어섰다.

 

아저씨가 괜찮냐고 물으셨고, 나는 괜찮다면서 학교에 갔다. 아마 아이니까 원체 가벼워서 큰 탈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삼일째 되는 날, 세수하는 나를 유심히 보던 엄마가 물으셨다.

 

"왜 오른손으로만 세수해?"

 

"응, 왼팔이 안 올라가..."

 

"무슨 일 있었어?"

 

"응, 차하고 부딪혔거든."

 

멘붕이 온 엄마는 당장 나를 데리고 병원 - 그때는 접골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 갔다. - 에 가셨고 나는 깁스를 했다.

 

당시 cctv 같은 것은 없었기에, 나는 누구와 사고가 났는지 모르고, 다행히 뼈는 잘 붙어 잘 지내고 있다.

 

 

<추억2>

 

지금은 이월드라고 이름 바뀐.. 대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놀이공원이 있는데,

 

그것이 지어지기 전에 우리집 뒷산은 숲으로 가득했다.

 

그때는 풍뎅이들이 참 많았고, 그때의 친구들 동네형들과 함께 뒷산에 풍뎅이들을 잡으러 매일 다녔다.

 

현재도 위치하고 있는, 두류도서관 맞은편이었을 거다.

 

산에서 도로로 우리는 폴짝 뛰어내렸다. 내 차례가 되어서 나도 뛰어내렸는데,  나뭇가지에 걸렸던 모양이다. 

 

발이 아닌 이마로 착지했다. 피가 줄줄 나고 있는 상태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갔고,

 

지나가던 어떤 20대 누나가 손수건을 준 기억이 생생하다.

 

대구가톨릭병원이 근처에 있어서 응급실로 엄마와 갔고,

 

마취도 안한 상태로 이마를 꿰맸다.

 

엄마는 독하다고 했다. ^^ 

 

 


1학년이 체 마치지 않고 아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직장 생활이 아닌 섬유기계 6대를 가지고 자기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이때 우리 가족은 태전교로 이사를 가고, 나는 매천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아직 어려서 슬픈 마음 등등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만남의 기쁨도 헤어짐의 슬픔도 느낄 나이가 아니다. 

 

회사에서 보이는 1학년 어린 아이들이 이사를 가거나 전학을 가면 그렇게 잘 해 주었는데도,

 

웃으면서 가는 것을 보면.. 아.. 어린이들은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여기에서 1학년~ 4학년까지 보내게 되었다. 

 

1학년 7반에서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2학년때는 3반이었다. 

 

두 가지가 기억난다. 내가 제일 뒤에 앉았는데,  지금으로 생각하면 공개수업일 듯하다. 

 

수업을 하는데, 이상한 아저씨들이 막 들어왔다. 어린 마음에 나는 수업 중에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 귀엽다.

 

신문 배달도 반마다 다녔는데,  꼬맹이가 어린이 신문을 들고 반마다 다녔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표창장을 주셨다. 

 

3학년때는 5반이었다. 

 

드디어 오전반 오후반을 경험하게 된다. 

 

매천초에는 씨름부가 유명하다.

 

그래서 내 친구 한명도 아들래미 씨름 시킨다고 거기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당시에도 씨름했던 친구, 서정범이 기억난다. 혹시나 싶어서 씨름나올때마다 보는데, 한번도 찾을수는 없었다. 아마 초등때 취미로 잠시 했던 모양이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운동회였던 것 같다. 

 

좀 얍삽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개인 달리기였는데.. 막 뛰다가 내 옆에 친구가 내보다 빨리 가니까 레인 무시하고 그 앞에 끼어들어서 길막했던 것이다. 

 

그 친구가 월등히 빨랐는지, 다시 나를 추월했고, 그 친구가 1등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 부끄러운 기억이다. 이름모를 그 친구에게 오래전 일이지만 다시 한번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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