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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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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제사.... 처가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냈다. 장인어른, 장모님 세대에서 제사를 끝내실 거라고 선언하시고는 마지막 제사를 드린 것이다. 마지막 제사의 주인공은 집사람 친할아버지, 할머니이다. 장모님께서 코로나 기운이 있으셔서 집사람이 가지 말자고 하였다. 그래도 내가 억지로 우겨서.. 나름 마지막 제사인데... 꼭 가도록 하자며.. 사랑하는 열이와의 약속도 부득이하게 파기하고 들렀다. 큰 내색은 안 하시지만 내심 좋으셨던 모양이다. 사실 가까이 살아서 늘 왕래하지만.. 이런 행사는 다른 차원이니... 돌아가신 시어른들께 "어머님, 아버님 오늘이 마지막 제사입니다. 다음부터는 산소에 가서 인사드릴게요." 라고 하시면서 장모님은 울음을 터뜨리신다. 마음이 참 곱고 여리신 분이다. 흔히 제사로 인해 흩어졌던 식구들이 모이는..
나의 이사 이야기 (9) - 세번째 이사를 준비하며 원래는 두번째 이사인데... 지금 세번째 이사를 준비중이라서 이거 먼저 쓴다. ㅎㅎㅎ (아무도 읽지는 않지만 ㅋㅋ) 지난 주에 다음 이사갈 집 월세 계약을 하고 왔다. 연일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한국 제2의 IMF 오는가?' '가계부채 사상 최대!' '경매 물건이 쏟아진다.' '2024년 대한민국이 망한다!' 물론 유튜브 알고리즘이 관련된 것만 알려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지금 집을 사기에는 좀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집사람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래서 집사람과 나는 하락장에 베팅하기로 했다. 물론 집 때문에 힘들어 내놓는 사람의 물건을 줍줍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신 사나워서 내 놓는 물건이 있기를 바라는 착한 마음이다! ^^ 월세 물건..
대만 여행 준비 - 탑승 수속 https://www.youtube.com/watch?v=tVFok3z8OYU
나의 이사 이야기 (8) - 독립 20대 초반까지 부모님과 함께 공장에 딸린 컨테이너에 살았다 . 동생이 부산부산해양대를 졸업하고 먼저 취업을 했었다 . 그래서 나보다 먼저 경제적으로 눈을 뜬 듯 하다. 어느날 말한다. "히야, 옆에 아파트 미분양 전세 떴는데, 우리 거기로 가자." "니는 주말에만 오는데, 말라꼬.." "그래도 아파트 한번 살아보지 뭐." "그러든가." 당시에 2008년 미분양사태로 회사보유분 전세가 엄청 풀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하나 줍줍할 껄.. 하지만 우리가 돈이 없어서 못하지, 정보가 없어서 못하나. ㅎㅎ 어쨌든 동생이 대부분 마련하여 30평, 6000만원 전세에 혼자 살게 되었다. 엄마, 아빠도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안 가신단다. 늘 미안하신 모양이셨던 것 같다. 보통 아들들이 결혼하고 독립하고 하면, ..
나의 이사 이야기 (7) - 성서에서 옥포로 성서에서 초5부터 고1까지 살았던 것 같다. 거진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여기에서 보낸 듯하고... 어느덧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나는 친구들은 많이 없지만, 가끔 만나는 학창시절 소중한 친구들도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이긴 하다. 20대 초중반에 어떤 몹쓸 병에 빠져 있어서 인간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는데, 그래도 내 10대를 기억할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각설하고... 성서 공장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옥포 공장으로 또 이사를 갔다. 아버지 공장 주인이 부도가 나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성서 공장은 공단이었는데, 옥포는 공단까지는 아니고 띄엄띄엄 공장이 있는 곳이었다. 아마 이때 내가 꿈꾸던 집은 빨간 벽돌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그냥 시멘트에 스레트(슬레이트)지..
나의 이사 이야기 (6) - 칠곡에서 성서로 아빠가 공장을 조금 크게 확장하셨는 것 같다. 기계가 6대에서 엄청 늘어났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발을 빼셨다면, 지금 더 잘 사셨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후회는 해서 뭐하랴... 나와 내 동생...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지금 지내고 있으면 된것이지... 다만, 엄마가 덜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오랜 노동으로 인한 근골격계질환이 안 생기셨을지도 모르겠다. 칠곡에서도 공장사택에 살았고, 새로 이사온 여기 성서도 공장 사택이지만,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여기는 공업단지였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아무도 없는... 이사 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으셨는가 보다. 나중에 알기로는, 성당동 집도 팔았고, 보증 관련해서 무엇인가 이상해지고... 무엇을 해결하시느라 늘 밤에 사람 만나러 가셔서 나와 내동생..
나의 이사 이야기 (5) - 칠곡 두번째 이야기 4학년때는 5반이었다. 기억나는 것이 많다. 1. 담임선생님께서 결혼을 하셨고 2. 과학발명품?을 만들라고 엄마가 돈을 줬는데, 장난감 샀고 3. 단체로 친구를 놀리다가 친구가 입원했고... 4. 전학간 친구집에 버스타고 놀러갔고 5. 베프를 만들었던 기억.. 꽤 떠오르다. 간단히만 적어보자.. 죽을때가 되었나.. 왜 옛날 생각들이 나는지.... 1. 담임선생님께서 결혼을 하셨다. 나는 학생이었는데, 엄마랑 결혼식 간 기억이 난다. 그런 문화였나.. 지금도 담임선생님께서 결혼을 하시면 가서 노래를 하니마니 이런 것읃 본 것 같은데 그냥 학생이 가서 뭘 하는 것은 잘 모르겠다. 남편이 검사였던 것 같다. 지금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했지만, 그떄 꼬마가 뭘 알았나.. 우리 담임선생님 대단하셨네;;;;;; 2...
나의 이사 이야기 (4) - 어린 시절(from 성당동 to 칠곡 태전교) 우리 아이들은 아침에 나가면 오후에 들어온다. 자전거와 축구공을 가지고 어디를 다니는지, 하루 종일 쏘다닌다. 이렇게 동네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동네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는데, 이사를 간다면 이 아이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내 어린 시절 이사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려 한다. 반백살에 다가가고 있어서 기억이 드문드문 나고 그 시절의 교우관계는 이제 다 소원해졌지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한번 써보자. 최초의 기억은 지금은 '초등학교'로 변해버린 '국민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당시 나의 이사는 부모님의 재테크 목적이 아닌, 공장의 이동에 의한 것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작은 섬유공장을 하셨다. 이때 부모님은 '직원'에서 '사장'으로 변신을 시도하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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